국난과 모진 풍파 세월의 상흔을 품은 모던 공간 덕수궁을 이야기하다 < 문화 < 기사본문 아파트관리신문


지방의 가마터는 왕실 납품의무에서 해방되는 대신 요역, 즉 노동력을 바치도록 했고, 분원 요역이 끝난 도공들이 고향 가마터로 가서 기술전수가 이뤄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15세기에 유행했던 분청사기 가마터들이 16세기부터 대부분 백자 가마터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후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병자호란 후에는 기근과 재해로 조선은 휘청거렸다. 조선이 가장 가난했던 17세기에 백자는 회색빛이 많았다.


옛날 옛적엔 뜻 맞는 사람끼리 강에 나가 고기도 잡고, 잡은 고기를 요리해서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주로 삼복에 일손 없는 날을 골라 이른바 천렵(川獵)을 즐기는 것도 옛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놀이였다고 합니다. 가운데 생선 요리를 놓고 둘러앉은 네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한 명은 그 뒤에서 혼자 술병을 독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네요. 한 소년이 나무 뒤에서 지켜보며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라나, 기회를 엿보는 것만 같아 웃음을 줍니다.


어쩌면 음식문화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가장 고차원적인 문화가 아닌가 한다. 음식에 대한 관심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속한 사회가 고차원적으로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임금의 활동과 나랏일을 다루는 『조선왕조실록』에서까지 무슨 중요한 이야기처럼 지면을 할애해 기록해 둘 정도였다는 점이 그 증거다.


중국도 해상금지령을 해제하고 다시 청화백자를 수출했고, 네덜란드 델프트 지역에서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는 크락(Kraak)자기를 생산하면서 유럽의 부잣집마다 청화백자가 채워졌다. 그렇게 청화백자는 상류층의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안타깝게도 고려청자는 14세기 말부터 쇠퇴해 수출 명품의 명맥이 끊어졌고, 조선은 분청사기와 백자를 독창적으로 개발했음에도 당시 해외시장에 끼지 못했다. 내륙의 안동에 친정을 두고 바닷가 영해에 시집을 갔다가 다시 내륙인 영주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안동 장씨(安東 張氏) 장계향은 안동과 그 일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안주인이었다. 그녀가 쓴 『음식디미방』은 남성들이 쓴 다소 피상적인 음식 문헌에 비해 매우 구체적으로 음식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이를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소설만 읽는 것이 아니라 옛이야기도 들려주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던 것이다. 앞에서처럼 이들은 문장에 가락을 붙여 유창하게 낭독했을 뿐 아니라 내용에 따라 온갖 표정과 몸짓을 섞어가며 아주 실감나게 읽어 주었다. 조선후기 유명한 전기수로는 이자상, 이업복, 김옹(김중진) 등을 들 수 있다.강창사(講唱師)는 어떤 이야기를 ‘창(唱)’에 얹어 구현하는 사람으로, 흔히 판소리 광대, 판소리 소리꾼이라 불렸다. 대표적으로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등이 있었다.그렇다면 왜 이런 전기수라는 독특한 직업이 생겨났을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양반과 상민 할 것 없이 누구나 소설을 읽고 싶어했다. 그래서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가 성행하고, 싼값에 찍어낸 방각본 소설까지 나왔다.


‘이슬람 서울 성원’이 있는 우사단로10길에는 중앙아시아와 아랍권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 회사들과 여행사들, 인도 요리와 터키 요리를 파는 음식점들, 그리고 할랄 식재료를 갖춘 식료품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국적 분위기를 찾는 한국인들이 찾는 동네이기도 하지요. 아이들에 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전해진다. 친부모가, 친척이, 의부, 의모가 아이를 학대하다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뉴스가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아울러 역사적 주요 사건들도 함께 다루어 조선시대의 큰 역사적 흐름도 놓치지 않도록 유념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실제 생활의 기록인 일기나 편지, 그리고 개인 문집의 다양한 기록 등을 토대로 조선 시대 남자의 살림 참여 모습을 살펴보았다. 조선은 16세기까지만 해도 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남녀 공존의 시대였고, 이는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이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요, 정치권력을 기준으로 바라본 또 다른 남자 중심적인 시각이다. 정확한 남녀의 관계, 그리고 전통시대 여성상을 알기 위해서는 집안을 둘러싼 실질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1999년 처음 뉴욕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근무한 레스토랑이 노부(Nobu)다. 미쉐린 3스타를 거머쥔 노부는 당시 예약에만 6개월이 소요됐다. 일식이 세계적으로 익숙한 장르가 된 것에 노부의 역할이 컸을 거라 본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고 느낀 게 ‘왜 한식을 이렇게 풀어내는 곳은 없지?


요즘 K-타운이라 불리는 32번가에 가면 뉴요커나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온 관광객이 많다. 한국 유학생, 주재원 또는 한식이 그리운 관광객이 주요 고객이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2020년 록펠러 센터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식당가 개편 작업에서 아시안 퀴진으로 일식과 중식이 아닌 한식을 떠올렸다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사람들에게 이태원은 외국군대 주둔지, 외국인들이 많은 이국적인 동네, 그리고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핫한 공간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태원, 하면 참사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이태원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태원을 아는 많은 이에게 아픈 공간이 되었습니다.


'3부 동소문 밖 복사꽃 유람'은 이번 전시의 중심 주제로, 조선 후기 봄꽃 나들이의 랜드마크 ‘북둔도화北屯桃花’를 조망한다. 성북천 일대의 복사꽃 유람을 노래한 다양한 시와 산문, 유람 문화와 그 정취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회화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조선 시대부터 이태원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글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이태원은 성저십리 지역이라 공식적으로는 묘지를 쓸 수 없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에 규제가 느슨해지며 묘지가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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